전집과 학습만화
유아들에게 그림책은 엄마, 아빠와 함께 가지고 놀게 되는 장난감과 같은 것입니다. 화사하고 재미있는 그림이 가득하고, 짧은 글들이 적혀있기 때문에 많은 유아들이 읽게 됩니다. 아직 말은 못 알아듣지만 그림을 통해 엄마, 아빠의 목소리에 담긴 뉘앙스로, 아이는 그림책을 느끼게 됩니다. 웃기도 하고 손으로 짚어보기도 하면서 즐겁게 놀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그림책을 읽어줄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독서는 곧 위기에 빠지고 만다고 합니다. 대체로 그 위기는 한글 교육과 함께 방문 판매의 형태로 찾아오거나 이웃집 부모의 모습을 통해 찾아오곤 합니다.
'이번에 어디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사 전집이 정말 좋더라. 애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한 번에 대여섯 권은 그냥 읽어요'와 같은 말을 듣게 되면 누구나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연령대별로 읽어야 할 전집을 하나둘씩 사게 됩니다. 세계명작, 한국사, 세계사, 과학, 수학, 위인전 등 종류과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반드시 읽어야 할 전집이 있다는게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뒤처져도 한참 뒤처진 셈입니다. 유아용 전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정말 독특한 형태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전집은 우리나라 유아 출판 생태계를 만든 효자 종목이라고 합니다. 그램책은 제작단가가 높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그림책을 읽히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작 단가는 높고 소비자는 없으니 도저히 뿌리내릴 수 없는 문화산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전집입니다. 대자본 투자로 권당 제작 단가가 낮아졌고, 한편에서는 유아 도서 판매자들이 가정을 방문해 독서의 중요성을 퍼뜨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고, 강아지똥이나 구름빵과 같은 훌륭한 단행본 그림책들도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전집의 마케팅 전략이 독서를 공부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전집 판매자들은 연령에 따라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알아야 할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옛이야기, 세계 명작, 국내 창장, 외국 창장, 과학, 역사 사회, 수학에 이르는 전집들은 시기에 맞춰 읽지 않으면 학습경쟁에서 뒤처진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설득되는 순간 독서는 학습이 되고 맙니다. 놀이여야 할 독서가 공부가 되버리는 셈입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놀이와 일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둘 다 수행할 과제가 있다는 점,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을 놀이처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자발적이지만 대부분의 일은 비자발적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의해 수행해야 할 범위와 목적이 규정될 때, 그 범위와 목적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일은 괴롭고 지겨운 것이 되고 맙니다. 당연히 몰입을 기대하기도 힘듭니다.
독서 역시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전집은 보통 30~50권으로 구성됩니다. 아이의 취향과 상관없이 한꺼번에 30~50권의 책이 서가를 채우게 됩니다. 이 책들은 이미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다 일겅야 합니다. 아이의 취향과 자율적 선택이 제거됨으로써 아이는 독서를 정해진 읽을 거리를 해치우는 수동적인 행위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전집은 서가의 한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해결해야 할 마음의 짐이 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